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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자를 쓴 것만 같은 곱슬머리 남자아이의 쇼팽 연주. 중학교 시절 학교 강당에서의 레이저 디스크로 이루어진 키신과의 첫만남이었다. 냉정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에 곧게 편 허리와 쳐든다는 표현이 적합한 목, 손가락을 거의 구부리지 않고 손목의 회전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던 터치, 이마 위로 한 가닥 내려온 머리카락이 내내 거슬렸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기만 하다. 나보다 고작 서너살 많아 보이는 소년의 기가 막히는 연주는 그 자체로 감동의 연속이었다. 20여년 동안 단 한번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은 키신(적어도 우리가 보기에는). 그 흔하디 흔한 콩쿨 한번 나가보지 않고도 언제나 음악계의 중심에 군림해 온 그의 이력은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이 식상할 정도로 화려하기만 하다. 결코 허튼 데에 눈길 한번 주지 않을 것 같은 키신이지만, 그의 대답은 의외의 반응이다.“피아노를 좀더 많이 연주하고 많은 책을 읽었으면 좋았을 것을, 십대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어릴 때에는 실수를 하게 마련이고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단지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워낙 어릴 때부터 무대에서 커왔고 늘 최고를 달려왔기에 언뜻 ‘그는 거만할 것이다’라고 단정짓게 된다. 하지만 익숙할 것만 같은 무대에서의 어색한 걸음걸이와 잔뜩 경직되고 긴장된 그의 표정은 ‘스타 특유의 거만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또한 어떠한 질문에도 한참 후에야 대답하곤 하는데, 대답하기 전에 머릿속에서 한번 더 생각하는 신중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말은 느릿느릿하며, 임기응변식의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그가 영어가 서툴러서라고 단정짓기도 하지만… 이러한 신중함은 그의 레퍼토리에서도 나타난다. 일종의 ‘편식’으로 느껴질 정도로 주로 낭만주의 음악을 연주하고 녹음해온 것이다. 그의 40장에 가까운 음반과 지금까지 그가 해온 수많은 콘서트 중에서 베토벤 소나타 ‘열정’과 피아노 협주곡 두 곡, 하이든 피아노 협주곡 두 곡의 음반과 연주시 종종 들려주는 모차르트 소나타 몇 곡, 현대 음악으로는 프로코피에프와 쇼스타코비치 협주곡을 제외하고는 쇼팽·슈만·라흐마니노프·리스트 등 낭만주의 음악이 대부분이었다. 그가 어린시절부터 흠모해왔다는 바흐도 부조니가 편곡한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연주하지 않는다. 드뷔시의 작품도 아르헤리치와의 두오 외에는 한번도 연주하거나 녹음한 적이 없다. “인상주의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것은 음악적인 이유라기보다 테크닉적인 문제입니다. 인상주의 음악이 요구하는 톤과 터치는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거든요. 그것이 제가 그들의 음악을 연주하는 데 있어서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반면에 바흐와 베토벤을 그동안 연주하지 못한 것은 다른 이유입니다. 그 곡들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서른, 잔치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서른을 맞은 그의 레퍼토리에 눈에 띄는 변화가 왔다. 그의 연주회에 베토벤 소나타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베토벤은 저에게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해석에 대한 특별한 지침 같은 것은 없어요. 그저 자연스럽게 그 음악이 저에게 다가오는데요, 각각의 음악이 저에게 주는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 그 해석 역시 곡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키신의 옛날 모습만을 기억한다면, 적어도 그의 라이브 연주를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우리나라 청중들에게 베토벤을 연주하는 키신의 그림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여기에 그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신보가 발매되었다. 지난 8월 슈만의 ‘소나타 제1번 f#단조 Op.11’과 ‘카니발’을 담은 음반이 출시된 것이다. 올해 3월에 출시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바흐/부조니의 ‘토카타, 아다지오 & 푸가 BWV564’, 글린카의 ‘The Lark’을 담은 음반과 같은 시기(2001년 7월과 12월)에 녹음된 이 음반에서 비록 베토벤은 아니지만 우리는 서른을 맞은 키신의 달라진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도전은 각 곡이 지니는 정확한 이미지를 포착하는 일입니다. 함께 녹음했던 ‘전람회의 그림’과 슈만은 확실히 다른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있어요. 제가 모스크바 음악원에 다닐 때, 한 학생에게 슈만의 ‘카니발’을 과제곡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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